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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의 고도 웅진으로의 주말가족나들이

  • 작성자전체관리자
  • 작성일2017-02-28
  • 조회수1393

세계문화유산의 고도웅진으로의 주말가족나들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투어700년 대제국 백제를 거닐다.

고대국가 백제가 찬란한 역사를 꽃피웠던 지역 공주!
오랜시간 많은 모습들로 변해 온 공주에는 아직도 과거 고대국가 백제로 타임리프 할 수 있는 장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1,500년전의 백제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오늘은 고대국가 백제로 가족나들이를 나가보자~

코스01

1,500년을 지켜온 백제의 魂, 송산리고분군

백제가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8),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까지 64년간 도읍지로 삼았던 곳인 공주 송산의 야트막한 구릉 경사면에는 왕실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고분이 있다.

바로 백제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을 수 있는 송산리고분군이다. 백제시대의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때 이미 조사가 이루어져 약 30여기 이상의 무덤들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현재 7기가 복원이 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공주의 옛지명 이름은 ‘웅진(熊津)’이며, 한글 표기는 ‘곰나루’ 이다.

공주의 옛지명 이름은 ‘웅진(熊津)’이며, 한글 표기는 ‘곰나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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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고분군에 가기 전 둘러보면 좋을 곳이 하나 있다. 웅진백제역사관인데, 미디어 기기 및 각종 체험존을 통해 보다 쉽고 흥미롭게 백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즐길거리를 통해 역사공부를 할 수 있어 단연 인기다. 전시실, 체험관, 영상관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과정과 내용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과정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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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문화와 예술은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한다.
웅진백제역사관은 무령왕릉의 외벽을 본떠 만든 박물관으로 백제의 역사, 백제왕들의 업적, 무령왕이야기, 공산성의 백제시대, 전통복식체험등 직·간접적으로 백제의 문화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코너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송산리고분군을 관람하기에 앞서 들려보면 좋을 곳이다.

웅진백제역사관을 둘러보며 백제의 문화와 시대상이 조금은 익숙해진다. 백제시대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의 역사/문화를 느껴보기 위해 필요한 준비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면 백제시대의 가장 찬란했던 시간으로 들어가 보자.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송산리고분군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송산리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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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는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700원(단체 30인 이상 1,400원, 900원, 600원)이며 주차시설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매표소를 지나면 금방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에 도착한다.

송산리고분군은 발굴 이후 일반에게 공개 되어 출입이 가능했으나 이후 문화재 보존을 위해 영구 비공개하게 되었다. 고분군 내부 관람을 제한 후 모형관을 재현하여 관람객에게 전시하여 실제 고분내부를 관람할 수 없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도록 했다.

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 입구

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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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 내부

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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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전시관 내부는 송산리고분군 5, 6호분과 무령왕릉을 복원·전시하고 있으며 왕릉의 전문 정보로 가득하다.

무령왕릉을 짓기 위해 벽돌을 생산하고 건축하는 과정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 과정을 공정별로 재현해놓은 디오라마는 특히 눈길을 끈다. 무덤 벽돌의 제작 수준과 공법이 당대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어 백제웅진시대의 문화적 우수성을 느낄 수 있다.

축조과정3 – 부장품 제작

축조과정3 – 부장품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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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조과정4 – 무덤터 닦기

축조과정4 – 무덤터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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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당시 중국 양나라의 벽돌 기술을 받아들여 축조한 벽돌무덤이며 그 구조의 정밀함은 신기하고 경이롭기만 한데 그 당시 왕의 죽음은 끝이 아닌 저승세계에서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왕과 왕비가 저승에서도 쓸 수 있도록 각종 장신구와 생활도구 등 부장품들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송산리고분군에는 ‘굴식돌방무덤’ 과 ‘벽돌무덤’이 있다. 이들 무덤들은 백제가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천도하는 475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6~7호분을 제외한 1~5호분은 굴식돌방무덤으로 되어 있다.

  • 널방(玄室) : 굴식에서 유체(遺體)를 넣은 관을 안치한 네모형의 방.
  • 널길(羨道) : 고분(古墳)의 입구에서 널방[玄室]에 이르는 통로.

무덤 내부의 규모는 대략적으로 널길의 길이 2m 내외이며, 폭과 높이는 1m 내외이다.

널방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와 폭이 3m 내외이고, 바닥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천장의 구조는 활 모양으로 널방 벽면의 모습이 바닥에서 1m까지는 수직으로 쌓고 이후부터는 서서히 안쪽으로 좁히면서 쌓아올려 정상에 이르면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마감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 5호분 굴식돌방무덤을 재현

송산리고분군 5호분 굴식돌방무덤을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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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식돌방무덤은 묘도(墓道), 널길[羨道], 널방[玄室] 및 원형의 둘레돌과 봉분을 갖춘 형태를 말하는데 삼국의 지배층 무덤은 거의 이러한 굴식돌방무덤으로 구성된 경향을 보인다.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적인 약점으로 손쉽게 도굴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에 무덤의 주인과 함께 매장되었던 부장품들이 상당량 도굴되어 당시 문화상을 밝히는데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한다.

벽돌무덤은 말 그대로 벽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을 말하는데, 구조적인 면에서 굴식돌방무덤과 비슷하나 아치형 천장구조나 무덤 내부에 그려 넣은 벽화 등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내부 벽면에 그려 넣은 사신도이다.

이러한 무덤의 형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송산리고분군 6호분 모형– 벽돌무덤

송산리고분군 6호분 모형– 벽돌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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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무덤인 6호분 내부 모형으로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 오수전 : 우리나라 초기 철기시대 및 백제 유적에서 출토한 화폐를 뜻함.

송산리고분군은 우리에게 다른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고구려에 패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에 새로 정하고 이후 백제를 부흥시켰던 제 25대 무령왕이 그 무덤의 주인으로 이미 짐작하였겠지만 바로 무령왕릉이다. 정확이 말하자면 송산리고분군 7호분이 바로 이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의 경우 삼국시대 왕릉 중 주인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역사/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어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송산리고분군 7호분(무령왕릉) 내부 – 벽돌무덤

송산리고분군 7호분(무령왕릉) 내부 – 벽돌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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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리 – 무령왕릉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다.

등자리 – 무령왕릉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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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와 세로쌓기를 반복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와 세로쌓기를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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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분과 마찬가지로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으며,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 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게다가 함께 발견된 관장식과, 장신구, 생활용품도 대단하지만 무덤벽돌의 제작수준과 공법은 당대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어 백제웅진시대의 문화적 우수성도 함께 증명하고 있다.

‘발굴당시의 무령왕릉’ 을 재현해 놓은 모형관도 볼 수 있는데 관은 폭삭 내려앉은 채였고 도자기는 넘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으며, 내려앉은 관재 사이로 유물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모든 유물들이 제자리를 이탈해 있었다고 한다. 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었는지, 1,500년 동안 지하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발굴 당시 무령왕릉 내부를 재현해 놓은 모형관

발굴 당시 무령왕릉 내부를 재현해 놓은 모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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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무령왕릉 내부를 재현해 놓은 모형관

발굴 당시 무령왕릉 내부를 재현해 놓은 모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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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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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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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왕릉에 대한 각종 정보검색과 함께 영상, 패널, 디오라마 등 전시 연출시설도 설치돼 있어 고분을 주제로 하는 역사퀴즈, 기념사진 찍기 등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모형관 관람을 마치고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 처음으로 보이는 고분이 바로 6호분이다. 6호분 동쪽으로 있는 5호분을 지나면 입구가 굳게 닫힌 무령왕릉 앞에 다다른다. 모형관에서 보고 들은 기억을 되새기며 백제 왕족의 위상을 느껴보자~!

 

6호분 능은 7호분 능인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가장 큰 유명세를 타던 능이었으나 현재는 무령왕릉이 유명세에 눌려 답사객의 시선을 오래 받지 못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 7호분 – 무령왕릉

송산리고분군 7호분 –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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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고분군 7호분 –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인해 재조명된 백제사

송산리고분군 7호분 –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인해 재조명된 백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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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사이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기존의 백제 무덤과는 달리 전혀 도굴당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108종 4,6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 가운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무령왕릉의 발굴로 인해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백제문화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릉을 뒤로하고 송산 정상으로 계속 오르면 봉분이 높이 솟은 1, 2, 3, 4호분이 기다린다. 이 고분들은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직후부터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1927년에 조사된 4기의 백제 굴식돌방무덤으로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가운데 처음 발굴된 유적이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4기만이 복원되어 있다. 무덤은 대부분 도굴되었으나, 널방의 바닥에서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475~538) 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우리에게 영원한 백제의 왕도로 기억되고 있는 웅진!

백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은 단연코 공주(웅진)일 것이다. 700년의 긴 역사에서 64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워낸 역사의 시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송산리고분군을 뒤로 하며 나오는 길, 그 찬란하고 위대했던 백제의 역사가 다시 한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길 소망해본다.

 
여행 tip

송산리고분군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반나절 정도의 시간은 할애하는 것이 좋다.
송산리고분군을 오전에 둘러봤다면 매표소 입구 앞에 많은 벤치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간단한 간식이나 식사를 준비해서 점심을 먹고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송산리고분군 매표소 앞 휴게시설

송산리고분군 매표소 앞 휴게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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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고분군 매표소 앞 휴게시설

송산리고분군 매표소 앞 휴게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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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기송산리고분군 > 공산성

 자가용 (약 5분 소요)

  •  송산리고분군
  •  67m이동
  •  좌회전
  •  고마나루길을 따라 171m 이동
  •  ‘공산성, 공주교육지원청’ 방면으로 좌회전
  •  왕릉로를 따라 1.05km이동
  •  우회전
  •  웅진로를 따라 223m 이동
  •  공산성

 대중교통 (약 15분 소요)

  •  송산리고분군
  •  교동초등학교 정류장까지 약 264m 이동
  •  101(주공4창)(교동초등학교) 승차 후, 공산성 정류장에서 하차
  •  공산성까지 약 282m 이동
  •  공산성
코스02

웅진백제를 수호한 관문,공산성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맛있는 것도 먹고 아름다운 광경도 보며 눈에 담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게다가 어려운 역사를 직접 보고 쉽게 익힐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이 완성되지 않을까?

공산성은 그런 이유로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고 와도 좋을 곳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 공산성 입구

유네스코세계유산 공산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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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선정된 공산성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선정된 공주 공산성은 사계절 언제든 아이들과 함께 가족나들이가기 좋은 곳이다. 공산성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에 따른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할뿐더러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를 간직한 무한 잠재가치를 지닌 시간여행지이기 때문이다.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옛 조상의 숨결이 깃든 공산성, 한 걸음 한 걸음 즐거운 발돋움으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이곳을 다함께 거닐어보자!

공산성 금서루를 지나는 길

공산성 금서루를 지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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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금서루에 도착하면 공주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앞으로 눈앞에 펼쳐질 아름다운 광경을 아주 조금만 맛보고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성곽을 따라 공산성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하자.

금서루에서 바라보는 공주 신시가지

금서루에서 바라보는 공주 신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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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진남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 쌍수정에 도착했다. 인조 ‘이괄의 난’이야기가 깃든 이곳이 바로 쌍수정이다. 정자 앞에 나란히 놓인 느티나무와 말채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눈에 띈다.

 

쌍수정은 1734년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6일간 머물렀을 때,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군 토벌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정3품의 통훈대부라는 벼슬을 하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훗날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였고 이를 쌍수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쌍수정을 지나 쌍수정 사적비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 본다. 이괄의 난과 쌍수정에 얽힌 이야기가 후에 사적비가 되어 쌍수정 옆 비각에 둘러싸여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순간 무엇을 의미하는 곳인지 아리송해진다. 나무틈새로 슬그머니 머리를 넣어보니 세월의 흔적을 가득 품은 비석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보호각 안에 있는 ‘쌍수정 사적비’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비문에는 일괄의 반란,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행적,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아직 절반도 걷지 않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공산성에서 또 다른 신비로움을 만나본다. 바로 공산성 왕국 내에서 발견된 인공연못 ‘백제의 연못’이다. 이곳은 빗물을 받아 저장하거나 주변의 물 또는 금강의 물을 받아서 저장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에 어떠한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물을 내보내거나 빨아들인 흔적 또한 전혀 확인할 수가 없다. 백제시대의 찬란한 문화와 옛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가슴속 깊이 새겨본다.

 

백제의 연못은 백제시대 왕궁 내에서 발견된 인공 연못으로, 이곳에 빗물을 받아 저장하여 연못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왕궁 옆에 위치하여 화재 시 소방용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연못은 발견당시 일부분이 훼손되어 다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연못 발굴 당시에는 백제시대 삼종 토기, 그릇 받침 등의 토기, 기와편 등이 연못 안에서 다량 발굴되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 아이들 공만 쥐어주면 실컷 뛰놀 수 있을 듯한 규모를 갖춘 이곳은 왕궁지다. 조금은 추운 겨울의 싸늘함이 느껴지지만 따뜻한 봄에는 왕벚나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명소다. 우리 따뜻한 봄날, 꽃피는 공주에 꼭 다시 오기로 약속하자.

 

왕궁지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곳으로 추정된다.

공산성을 오르다보니 색색의 깃발들이 수수께끼처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붉은 깃발로 가득했는데 어느새 청색의 깃발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심코 지나쳤던 깃발은 송산리고분군 발굴시 벽화에서 나오는 사신도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깃발의 배치는 동서남북에 따라 다르며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하고 있다. 공산성 곳곳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건 꽤나 흥미롭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공산성의 출입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진남루는 삼남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이미 무너져 없어졌던 곳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영동루이다. 무심코 잊혀 졌을 법도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조사되고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새롭게 ‘영동루’라는 이름을 갖고 재탄생한 이곳은 이 시대가 만들어낸 진정한 보물일 것이다.

 

영동루는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하부구조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발굴 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통해 1993년 2층 문루로 복원하였으며, 잊혀진 문루의 명칭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라고 지었다.

근엄함이 물씬 풍겨지는 임류각을 바라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춰본다. 공산성 곳곳에 숨어 있던 보물들이 다시 밝은 빛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한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임류각은 정림사지 보호각과 함께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현한 건물 중 하나이다. 복층구조로 형성된 임류각은 백제 동승왕 때 건축되어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근래에 와서 다시 복원되었다.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던 명국삼장비 또한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혀있던 것이 발굴되어 현재는 이렇게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보존되고 있다.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금 느껴본다.

 

공산성 광복루 아래 임류각과 함께 비각 안에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준 명나라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원래 선조 32년(1599) 금강변에 처음 세웠다가 홍수로 매몰되어 숙종 때에 다시 세워둔 것으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왜구(倭>寇)’등의 글자가 훼손 되었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아무렇게나 매몰되었던 것을 광복 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한다.

황홀한 노을빛과 어우러져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 이곳은 ‘광복루’다. 감성 돋는 풍경과 함께 마음의 평화로움을 그려본다.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는 광복루는 중군영의 출입문이자 성 밖을 관찰하는 망루역할을 했던 누각이다. 본래 이름은 ‘해상루’라 하였으나 1945년 김구선생과 이시영선생이 와서 나라를 찾았음을 알리고자 ‘광복루’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금강을 따라 흐르는 백제의 매혹적인 향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곳은 공산성의 만하루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과 동화되어 마치 백제시대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금강의 절경과 동화되어 있는 만하루와 연지

금강의 절경과 동화되어 있는 만하루와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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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루는 금강을 가장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다. 만하루의 옆에는 연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다. 1980년 공산성 내 유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공산성 만하루에 대한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복원되었다.

공산성의 역사와 금강이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공산성 전망대에 도착했다. 공주시 신관동 일대의 공주시가지는 물론 공주 명소 신관공원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공산성의 하이라이트다.

신관동 일대의 공주시가지 전망뷰

신관동 일대의 공주시가지 전망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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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동 일대의 공주시가지 전망뷰

신관동 일대의 공주시가지 전망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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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따라 흐르는 백제시대의 역사, 비록 사람과 시대는 변하였어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문화와 역사가 깃든 공산성의 시간여행은 마치 또 다른 역사가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기대를 심어준다. 오늘은 또 다른 과거, 내일은 또 다른 미래가 될 터이니 말이다.

 

옛날에는 금강철교 바로 위에 배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나룻배 20~30척이 있었지만 공주시가 발전하면서 그동안 사용했던 나룻배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는데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배다리이며, 나룻배 30여척을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3m 폭으로 150m 길이의 배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견뎌내지 못하던 찰나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게 되어 그 보상으로 1932년에 금강철교를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금강철교는 등록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