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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공주로의 수학여행 1박 2일- C코스

  • 작성자전체관리자
  • 작성일2015-06-27
  • 조회수5260

백제 웅진시대의 유적 유물과 함께하는

공주로의 수학여행 1박2일 - C코스


첫째 날 국립공주박물관->무령왕릉->점심식사(밤묵밥)->공산성->박동진판소리전수관(국악체험)->추천 숙박지: 갑사유스호스텔(여장풀기/저녁식사/레크레이션/장기자랑/숙박/아침식사)->둘째 날 갑사(오리숲/표충원/대웅전/대적전)->영규대사묘->점심식사(계룡뜰자전거마을 농촌체험-점심식사 및 떡메치기체험)->석장리박물관->귀가




※ 이 코스는 박동진판소리전수관 탐방을 통해 전통국악 판소리에 대한 고찰을 입체적으로 할 수 있다. 명창 박동진선생의 유물과 자료가 망라된 전시관을 관람하고 명창의 현장지도 아래 판소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름다운 자연속의 전통고찰 갑사를 탐방하면서 역사 속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표충원이 그곳. 갑사의 사우(寺宇)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운 3분의 대표적 승장 서산·사명대사와 함께 영규대사의 영정이 같이 봉안되어 있다. 갑사 표충원과 연계하여 영규대사묘를 찾음으로 임진왜란과 의승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어서 영규대사의 묘와 사당이 위치하고 있는 계룡뜰자전거마을에서 마을 할머니들이 만들어주신 점심식사를 하고 떡매치기 체험도 하면서 고향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다. 다음 우리나라 남한 최초로 발굴되어 구석기유적의 조사·발굴·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 석장리박물관을 탐방하면서 인류의 기원과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에 대한 학습과 체험을 할 수 있다.

여행대상지 자세히 보기
1.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에 마련된 무령왕릉실에 전시되고 있는 무령왕릉의 출토유물은 가히 세기의 대 발견이라 할 만큼 역사, 고고학, 미술사, 문화재적 가치는 지대한 것으로 백제사가 안고 있었던 의문점을 푸는 열쇠가 된다. 출토유물 중 지석의 내용과 삼국사기의 내용이 일치하여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한층 높이는 등, 백제역사 전반과 67년간 백제 웅진도읍기를 밝히는 타임캡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 더불어 무령왕릉 발굴 이후 공주지역에서 발견되고 출토된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은 박물관 2층에 마련된 웅진문화실에 전시되어 고대왕국 백제의 수수깨끼를 풀어주고 있다.

1971년 7월 5일 송산리 제5, 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웅진백제시대의 처녀분 무령왕릉 출토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 무령왕릉실 입구. 사진만 보아도 당시의 놀라웠던 순간이 전해진다.



무령왕릉실의 중심에 출토당시 연도를 재현하고 왕과 왕비의 목관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진묘수와 지석이 발굴당시의 모습대로 전시되어 있는데, 지석 위에 올려 진 엽전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오수전』이라는 중국의 동전인데, 무덤이 위치한 땅을 토지신으로 부터 구입한다는 의미로 놓여 진 것이다.


무령왕릉실에 복원 전시되고 있는 왕과 왕비의 목관. 왕릉 입구의 진묘수가 지키고 있는 실체는 바로 영원히 잠든 왕과 왕비다. 진묘수 뒤로 놓여있는 두 개의 관은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금속공예품 전시실왕 관식이다. 관은 피장자의 신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로 백제지역에는 금제와 은제가 있다고 한다. 이는 중앙집권적 전제 왕권이 완비된 후 의관제의 신분적 규제에 의하여 차이를 둔 것으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도 나와 있다고 한다. 무령왕의 왕 관식과 왕비관식은 순금으로 만든 장식, 당시 금속세공기술의 우수성을 잘 말해주고 있는 유물이다.


우리문화체험실. 이곳에는 즐기며 체험할 수 있는 백제역사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기구가 준비되어있다.



2. 무령왕릉(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송산리 제5, 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굴된 웅진백제시대의 처녀분이다. 발굴결과 부장품 중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흥분시켰다. 지석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삼국시대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 하는 유일한 무덤이기 때문. 더불어 이 지석은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 보충과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의 신빙성을 높였으며, 백제인들의 사상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는 백제사 연구에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대하다.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는 대 발견이자, 사건이었던 무령왕릉의 발견은 웅진백제시대의 타임캡슐을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석과 더불어 이곳에서 발견된 왕관과 장신구, 생활용품도 그렇지만, 무덤의 석실 내부를 마감한 벽돌의 제작 수준과 공법은 당대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어 백제웅진시대의 문화적 우수성도 함께 증명하고 있다.

송산 남쪽자락에 조성된 송산리고분군 전경. 백제 웅진 도읍기에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등 네 왕이 죽었지만 송산리고분군의 무덤은 모두 7기가 확인되고 있다. 무령왕 외에는 다른 세 왕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고 이곳에 그 왕들의 무덤이 있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다. 이곳이 백제 웅진 도읍기 왕들의 무덤 터가 맞다 면, 7기 중 나머지 3기는 왕족들의 무덤이 아닌 가 추측되고 있다.



무령왕릉모형관 외경. 무령왕릉은 발굴 이후 일반에게 공개 되어 출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1997년에 왕릉을 정밀 조사한 결과 누수현상 등으로 훼손이 우려되어 원형보존을 위해 영구 폐쇄하게 되었다. 공주시와 문화재청은 무령왕릉폐쇄 후 모형관을 재현하여 관람객에게 전시하기로 결정 하고, 5년간의 공사 끝에 2003년 5월 15일 정식으로 개관한 이후 계속 내부 시설을 업그레이드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굴당시의 무령왕릉을 재현해 놓은 모형관. 유물이 흐트러져 있는 것은 지진의 영향으로 짐작하고 있다.


역사퀴즈를 풀고 있는 어린이. 백제역사문화와 관련된 주제로 제작된 게임을 즐기다보면 자연스럽게 백제의 역사문화가 가까워진다.



모형관을 나서면 연도가 동향을 하고 있는 무령뢍릉에 이를 수 있다.


3.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전열을 재정비하고 패색 짙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장으로 5대왕 67년의 백제 웅진사 써내려간 곳이다. 고구려에 맞서 영토를 지키고, 중국과 일본 등 외국과 활발히 교류한 해상왕국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백제. 그러나 475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도성인 한성이 함락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하자, 개로왕의 뒤를 이어 백제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이 한성을 버리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면서 공산성은 백제의 도성이 된다.
백제 웅진의 67년 도성이 된 공산성은 백제 이래 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세월과 시대의 변천을 겪어 온 역사의 장으로 그 세월만큼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공산성 성내에는 백제 때 건물지를 비롯하여 후기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산재해 있다. 조선 인조대왕의 일화가 전해지는 쌍수정 아래 광장은 백제의 추정 왕궁지. 성의 동쪽에 있는 임류각지의 발굴로 성내에 백제왕궁지가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무령왕릉 연도를 형상화 한 상징물 사이로 공산성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공산성 금서루 전경. 현재 공산성의 관문역할을 하고 있는 금서루는 공산성의 동문이다. 옛날 성이 성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시기는 공북루와 진남루가 주요 출입문이었다.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 연지 위 누각이 왕과 문무백관들이 풍류를 즐겼을 법 한 상상을 떠오르게 한다.


공산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공북루. 배를 타고 도강을 하여 이 문을 지나면 진남문을 거쳐 삼남대로가 이어진다.


공북루에서 공산정으로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다. 왼쪽이 연미산 가까이보이는 철교가 625때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폭파했던 금강철교다.


4. 박동진판소리전수관

92년 한 약품광고에 출연해서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창을 하면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대사를 했는데 이것이 유행어가 되면서 전통문화 바람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던 박동진 선생은 ‘토막소리’ 위주이던 판소리계에 완창 판소리의 새바람을 일으킨 판소리계 대들보이자 국악 보급과 대중화에 큰 공을 세운 국악계 거목이다. 전통 목조한옥으로 된 33평의 전수관과 44평의 자료실 겸 생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 판소리전수관은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선생의 뒤를 이어 선생의 수제자가 판소리 전문인을 양성하고 있으며, 판소리 전공자나 취미로 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1:1 교육과 학생을 대상으로 체험학습을 통한 판소리 강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박동진판소리전수관 판소리체험교실 전경


댓돌 위 아래로 즐비한 체험객들의 신발이 놓인 풍경에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판소리체험교실 안의 풍경. “합 쿵딱, 쿵 딱딱, 쿵쿵 딱, 쿵쿵쿵”단순한 장단인 것 같아도 반복하다 보면 헛갈리게 마련. 머릿속으로 외우려 하지 말고 구음으로 소리 내어 외우라는 당부와 함께 판소리체험이 시작된다.


몇 번을 북소리에 맞추어 구음으로 장단을 외우고 나면 잘 따라 하는 사람은 불려 나가게 마련인데, 실제 북채를 잡으니 어안이벙벙.


그러나 선생님의 재담과 격려에 용기를 내니 그럴싸한 가락이 나가는데, “이리 오너라 업고놀자~”하면서 선생님이 소리를 매긴다. 이 광경 지켜보던 체험객들 모두 무릎을 치면서 신기해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 장단에 그 창 한토막이 연결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 불려나간 사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구음 장단 연습은 계속 되는데, 그 열기가 처음과는 확실히 다르다.


5. 갑사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 북쪽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다. 부속 암자로 내원암,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을 거느리고 있는 거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가 창건하고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중건하여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전하며 679년 신라의 의상대사에 의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서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가 된 사찰이다.
갑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사천천왕문에 이르고 사천왕문을 지나 천년고찰 갑사에 이르는 길은 갑사가 자랑하는 오리숲. 오래 묵어 나이 많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운치 있는 길이다. 평균수령 150년은 족히 넘는 고목들이 자아내는 운치는 사시사철 계절마다 진한 감흥을 방문객에게 선사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의병장 중봉조헌(1544∼1592)과 의승장 영규대사(?~1592)는 청주성을 점령하고 청주 남방에 위치하고 있는 호서지방 점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왜적을 협공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조헌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를 포함한 의승병들은 조헌선생의 지휘 하에 금산전투에 임하고 왜군을 협공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를 포함한 의병과 승병 모두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오늘의 칠백의총이 탄생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운 3분의 대표적 승장이 있다. 한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1520~1604), 평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사명대사(1544~1610),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영규대사(?~1592) 등이 그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여생을 마쳤지만 영규대사는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입고 전사한 비운의 인물이다.

영규대사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왜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후 영규대사는 청주성 탈환을 위한 전투에 임하게 되는데,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청주 남방에 위치한 호서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청주 방어사 이옥의 관군이 무너지고 오로지 승장 영규대사의 군대만이 홀로 적병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방어사 이옥의 잔류군사와 의병장 중봉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합군(合軍)하여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청주성의 수복은 청주지역의 수복만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도로 진출하는데 교두보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큰 쾌거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 갑사표충원 (甲寺表忠院) 표충원은 영조 14년(1738)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퇴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범종루에서 바라본 갑사. 강당 뒤로 대웅전이 배치되어 있다.



갑사 경내의 지정 문화재로는 국보 298호로 지정된 갑사 삼신불 괘불탱, 보물 256호인 갑사철당간 및 지주와 보물 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478호인 갑사동종, 보물 582호인 선조 2년간 월인석보판목 이 있으며, 도지정문화재로 갑사석조 약사여래입상, 갑사석조여래 입상, 갑사사적비, 강당, 대웅전, 대적전, 표충원, 삼성각, 팔상전,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 영규대사비, 천진보탑등 다수의 귀중한 문화재가 남아있어 천년 고찰의 면모를 더해주고 있다.


대웅전 언저리 바라보이는 산이 계룡산이다. 갑사는 계룡산의 북쪽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6. 계룡뜰자전거마을

우리 마을은 계룡면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농촌마을입니다. 딸기, 부추, 표고버섯, 밤 등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은 자매결연을 맺은 단체와 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자매결연을 맺은 단체의 도시민 또한 우리 마을로부터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받아 서로 도움이 되는 상생효과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은 민족의 영산 계룡산이 마주보이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운 승병장 영규대사가 잠들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7. 석장리박물관

의식의 여명기를 맞이한 현생인류는 수렵, 어로, 채취 등 획득경제에 의존하여 생활하게 되는데, 주로 강가를 중심으로 그 생활무대를 펼쳤다. 이와 같은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석기시대의 유적 중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 된 곳이 공주석장리의 선사유적이다. 석장리 구석기유적의 발굴은 우리나라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여러 문화층이 단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으며, 구석기 유적의 조사·발굴·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공주 석장리유적은 평지유적으로 구석기인들이 선호했던 생활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나무열매나 뿌리 등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는데, 이 때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 또는 동물의 뼈나 뿔을 다듬어서 만든 골각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들 도구의 종류는 용도에 따라 다양하다.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등이 있으며, 요리도구로는 긁개, 밀개, 공구로는 새기개 등이 있다.

0년 10월 26일 사적 제334호로 지정된 석장리선사유적지. 우적 전면에 표석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적지 내에 재현된 움집. 발굴된 집자리의 규모와 형태대로 복원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가늠케 하고 있다.


사진은 석장리유적박물관 앞에 있는 슬기사람 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탄생으로부터 약 345만년이 지나 현생인류로 구분되는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게 되는데, 호모사피엔스를 직역하면, “지혜 있는 인간”이란 뜻. 우리말로 슬기사람으로 명명하였다. 이때의 인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의식(意識)을 획득한 유일한 생물로 현재로부터 약 4~5 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널리 분포하여 중석기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면 인류의 진화과정부터 당시의 삶, 불의 사용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며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수렵·어로 생활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전시물과 디오라마, 자료 등을 통해 선사시대로 빠져들 수 있다.



동선을 따라 박물관 관람을 하다보면 마지막 전시관에 마련된 체험관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석기시대의 도구 체험과 함께 석기시대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잇다. 사진은 메머드와 코끼리 이빨 모형을 직접 만져보며 당시의 생태계를 살펴볼 수 있다. 구석기인들이 수렵생활을 하면서 어떤 동물을 잡아먹었는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담당부서 :  
관광과
담당자 :  
원효정
연락처 :  
041-840-8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