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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웅진성 도읍 천도 이전의 공주

웅진성 도읍 천도 이전의 공주

공주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제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공주 지역에는 마한의 1개 국(國)이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목지국(目支國)을 월지국(月支局)으로 기재한 <삼국지> 판본에 따라 그 소재지를 공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공주 월성산(月城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토성을 축조한 세력과 같은 존재가 공주 일원에 포진한 국 세력의 하나로 보겠다. 이들의 생활상은 공주 탄천면 장선리와 그 주변의 토실(土室)과 장방형 주거지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주 지역에 소재했던 마한연맹 소속의 1개 국명(國名)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감해비리국(監爰卑離國)을 공주로 비정하기도 한다. 불운곡(不雲國)의 소재지로 공주 지여을 지목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공주 지역 세력과 백제와의 관계는 알려진 바 없다. 이와 관련해 백제의 영역 범위에 관한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8월에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를 고(告)하고 강장(疆場)을 획정( 定)하였는데, 북쪽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에 한(限)하고, 서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동쪽은 주양(走壤)으로 끝났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 권23, 온조왕 13년 조).

위에서 패하는 예성강, 대해는 서해를, 주양은 강원도 춘천으로 지정되고 있다. 문제는 웅천의 위치이다. 웅천은 지금의 금강으로 판단되므로, 백제는 북계(北界)를 예성강으로, 남계(南界)를 금강으로 하는 영역을 확보한 것이 된다. 이러한 영역범위를 명시하고 있는 <삼국사기> '온조왕대' 기사는 후대 사실의 소급(遡及) 가상(架上)이다. 그러므로 그 시기는 재검토되어야 하며,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다음의 기사를 유의해 본다.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의 침미다례 ( 彌多禮)를 도륙(屠戮)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肖古) 및 왕자 귀수(貴須)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 때, 비리(比利)·벽중·포미(布彌)·지반(支半)·고사(古四)와 같은 읍락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황전별(荒田別) 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함께 의류촌(意流村:지금의 주류수기(州流須祇)를 말한다)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禮)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이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 支山)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랐다.

위와 같은 백제의 마한경략 기사의 관련 지명에 대한 새로운 띄어 읽기가 시도되었다. 그에 따라, 신공기 49년 조에 보이는 백제의 마한경략 대상 지역은 대체로 금강 이남에서 노령산맥 이북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369년 '마한경략' 이전 백제의 남계(南界)는 금강이었다. 금강을 남계로 하는 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조'에서 웅천(금강)을 남계로 하는 영역 기사와 연결이 되고 있다. 369년 이전에 백제는 금강유역까지 영역을 확보했지만, 그 이남에 소재한 공주 세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369년에 단행된 근초고왕의 남정 결과 공주 지역은 백제의 영토로 편제되었다고 하겠다.

이 무렵, 백제가 공주 지역을 통치하게 된 형태는 알려진 바 없다. 백제는 금강 이북 지역을 5개의 구역으로 획정한 5부체제에 의한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금강이남 노령산맥 이북 지역은 거점 지배 형태인 담로를 통한 점(點)의 지배를 단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지역은 그 역사적 비중에 비추어 볼 때, 담로가 설치된 게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곳은 백제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어 통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웅진성으로의 천도 배경

웅진성으로의 천도 배경

백제 역사상 공주 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점하게 된 데는 그 왕도였기 때문이었다. 공주 지역이 백제의 왕도가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지역인 한성에 도읍하던 시기의 마지막 왕은 21대 개로왕이었다. 개로왕은 강력한 전제적인 권력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가장 커다란 저해 요인은 고구려의 남진 압박이었다.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북위(北魏)와의 각별한 외교관계를 통해 후고(後顧)를 덜면서 적극적으로 남진을 추진하여 나갔다.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은 고구려를 괴롭히던 북연(北燕)이 멸망한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예성강과 개성 근방에서 30여 년을 끌었다. 고구려와의 부단한 국지전은 왕권 강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와 함께 백제 국력의 극심한 소모 현상을 초래하였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재물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점차 저절로 쇠약하여졌다."라고 표현한 것이나, 한성함락 직전에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라고 한 개로왕의 체념적인 말투에서도 백제의 극심한 재정 궁핍 현상이 확인된다. 그럼에 따라, 백제 자체의 국력으로는 타개하기 힘든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 왕제인 곤지(昆支)를 왜에 파견하여 왜군의 동원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472년에는 과거에 교섭이 없던 북중국의 강자인 북위에까지 자신의 사위와 한인계(漢人系)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의 연안 지역과 일본열도에 구축된 상업무역 채널을 기반으로 한 이같은 백제의 전방위적 외교활동은 고구려와의 대결로 인해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외교활동은 고구려의 남진 압박을 타개하고 재정을 충원하는데 실효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와의 국지전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궁핍을 보충하기 위한 백제 왕권의 노력은 주민에 대한 한층 가혹한 수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성 함락 당시, 개로왕의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들여 싸우려 하겠는가·"라고 한 체념적인 말투에서 보듯이 민심이 왕권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정도로 주민에 대한 가혹한 수취가 자행되었다. 다시 말해, 전쟁과 역사(役事)에 소요되는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를 위해 개로왕은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지방 지배를 단행하였다.

공주성

그러나 대내적인 왕권과 귀족권간의 분규를 해소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단행된 고구려 장수왕의 기습적인 한성 공략으로 인해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피살되고 말았다. 475년 초겨울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 루트는 확인된 바 없지만 백제의 왕성인 북성과 남성 가운데 북성을 먼저 공격한 후 남성을 함락시켰다. 여기서, 북성은 풍납동토성, 그리고 남성은 몽촌토성으로 비정되는 만큼 고구려 군대는 한강을 건너 풍납동토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풍납동토성에 대한 공격은 수군에 의한 기습공격을 제외하고는, 한강 북안에 자리잡은 아차산성에 대한 점령없이는 어렵다. 그러므로 고구려 군대는 아차산의 동편인 지금의 구리시쪽에서 아차산성의 측면과 한강쪽에 면하여 성벽이 낮은 전면으로 우회하여 공격을 시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차산 북쪽 능선과 용마산 능선에는 보루가 있는데, 백제 군대가 주둔하는 상황이었다고 보이므로 공격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을 점령한 고구려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백제 군대는 한강변을 따라 길게 축조된 제방 위에 목책과 같은 방어시설을 세워놓고 저항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고구려 군대는 저지선을 뚫고 강변에 붙어 있는 풍납동토성을 에워쌌다. 포위한 지 이렛 만에 북성인 풍납동토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대는 여세를 몰아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옮겨서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대의 기세가 원체 강한 터라 몽촌토성 안의 백제 군대는 성문을 닫아 걸고 감히 나가 대적하지 못했다. 고구려 군대는 네 길로 나누어 양쪽으로 끼고 공격하면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성문이 활활 타기 시작하였다.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성안에서는 인심이 흉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형편이었다. 성을 나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개로왕은 형세가 곤란하여 수십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군대의 맹렬한 추격을 받았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등은 개로왕을 알아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 뱉었다. 이는 개로왕의 얼굴을 알아본 상황에서 표출된 분노의 표출이었다.

개로왕을 생포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은 본시 백제인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난 사람들이라고 하기 때문에, 개로왕과는 면식이 있었을 터였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재증걸루가 개로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씩이나 뱉었고, 그의 죄를 따졌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개로왕에 대한 사감(私感)이 깊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들은 개로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에 어떠한 형태로든 연루되었던 인물들로서 고구려 군대의 향도(嚮導)가 되어 백제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개로왕은 아단성(서울시 광진구 아차산성) 밑으로 묶여서 압송된 후 죽었다. 개로왕의 피살은 모처럼 구축한 왕족 중심 지배체제의 전면적인 붕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성이 함락되면서 개로왕 뿐만 아니라, 대후, 왕자 등의 피살 외에 왕권의 친위 세력이었던 유력 근친 왕족인 우현왕 여기(餘紀)와 종로장군 여휘(餘彙)를 위시해서 여예(餘乂)·여작(餘爵)·여류(餘流)·여루(餘累) 등의 존재가 웅진 도읍기에 일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로 보아, 이들 역시 한성이 함락되면서 개로왕과 운명을 같이 했거나 고구려군의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같은 왕권의 친위 세력인 왕족 중심의 지배체제의 붕괴는 웅진 초기 백제 왕권의 급속한 약화를 초래한 주된 요인이 되었다. 지배구조 내에서의 갑작스런 힘의 공동(空洞)상태는 결과적으로 귀족의 발호에 따른 웅진 초기 정정의 거듭된 혼미상을 초래한 것이다. 여하간, 한성함락으로 인해, 백제는 한번 망했던 것이나 진배가 없다. <일본서기>는 "그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창하(倉下)에 모여 있었다. 군량은 이미 다하여 근심하며 울기를 많이 하였다"라고 참담하게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