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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웅진시대 대중교류재개

백제 웅진시대 대중 교류 재개

“백제의 웅진도읍기 초기에는 남조의 송(宋)이나 북조의 북위(北魏) 등과 교류를 시도하였으나 천도 이후 내정이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류의 유일한 통로였던 서해의 해상권을 고구려에 빼앗겨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성왕-무령왕대를 거치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 남조의 남제와 송-양에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을 받는 등 활발한 교류를 재개하여, 천도 이후 어려웠던 국가 위기를 중국과의 국제 외교를 통하여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성왕-무령왕대를 거치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 남조의 남제와 송-양에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을 받는 등 활발한 교류를 재개하여, 천도 이후 어려웠던 국가 위기를 중국과의 국제 외교를 통하여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송산리고분군의 전축분과 무령왕릉의 중국 문물들, 그리고 부여-익산-부안 등 금강수계의 거점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도자기들로 사서에 전하는 중국과의 교섭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송산리고분군의 6호분과 7호분(무령왕릉) 등의 전축분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대중교류(對中交流)가 재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전을 이용한 장묘문화는 중국 한대(漢代) 이래 왕, 또는 상류지배자들의 무덤으로 남조(南朝)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국제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라 각지로 파급되었는데 무덤방과 널길 그리고 배수구 등 묘전으로 쓰인 무령왕릉의 전은 모두 28종류 이상으로 세분되며, 중국 남조 전의 형태와 일치하고 문자와 문양을 새긴 부위도 거의 일치 하는 등 남조의 전이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웅진시대에 재개되었던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써 무령왕릉과 송산리6호분, 교촌리3호분 등 송산리와 교촌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웅진도읍기 공주지역에만 한정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웅진시대 후반의 장묘문화는 묘의 축조에 있어서만 중국의 풍습을 따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부장품도 중국의 형식을 따르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묘실입구의 석수와 지석이 그것이다.

무령왕릉의 유물은 전축분과 함께 웅진시대의 대중교류를 밝히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무령왕릉의 전(塼)과 석수(石獸<돌짐승>), 지석(誌石)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대중교류(對中交流)가 재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수는 진묘수의 일종으로 진묘수는 기괴한 생김새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죽은 사람을 지킨다는 중국 부장문화의 일종으로 대개 묘실 입구에 놓아 사자의 방을 지키게 하는 의미이로서의 부장품이다.

그리고 무령왕릉 지석(능의 주인에 대한 기록과 땅의신<地神>에게 땅을 사서 죽은자를 안장한다는 일종의 주술적 가치를 지닌 널판형의 돌문서로 그 비용을 지불했다는 의미로 실제 쓰이는 돈과 함께 매장한다)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이 놓여 있었는데, 발굴당시 지석 위에서 오수(五銖)라는 글씨가 새겨진 철전(鐵錢<철로만든 돈>)이 한 꾸러미 발견되었다.

이 오수전은 토지 신에게 무덤 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은 것으로 중국에서 유행하던 도교사상(道敎思想)의 영향으로 보이며 묘의 축조는 물론 부장문화 까지 중국의 풍습을 따른 것은 무령왕 대에 이르러 그만큼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