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역사인물 가휴 조익(趙翊, 1556~1613)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중(棐仲), 호는 가휴(可畦)입니다. 1589년(선조 22) 일어난 기축옥사에 관한 직언을 올렸다 선조의 화를 불러 1602년(선조 35) 유배를 오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556년(명종 11)에 태어난 선생은 매우 영민하여 3세부터 문자를 해독했으며 16세에는 조부의 명으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이 되었습니다. 1582년(선조 15)에는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1588년(선조 21)에는 임금이 직접 주재하는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김홍민(金弘敏)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참모를 맡아 충보군(忠報軍)을 조직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하고, 관군에게 군량을 조달하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조정에 나아가 1599년(선조 32) 예조정랑·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1602년(선조 35)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정철에게 벌을 주려는 왕에게 직언하여 왕이 대노하였고, 그로 인해 공주로 유배를 오게 되었습니다.
1607년(선조 40)까지 약 5년간 계속된 유배기간 동안 선생은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임금의 안위를 염려하며 항상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선생의 유배 생활을 기록한 「공산일기(公山日記)」는 17세기 초 공주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유배가 끝난 후 선생은 조정에서의 관작이 회복되어 1610년(광해군 2)에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그만두고 귀향하였고, 1613년(광해군 5) 5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사후 200년 뒤인 1856년(철종 7)에는 유림들의 뜻으로 상주의 속수서원(涑修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공주시는 「공산일기」를 통해 공주의 모습을 기록하고 항상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조익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3년 4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공산일기로 공주의 모습을 남기다 가휴 조익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 자는 비중호는 가휴이며 공주에서의 유배생활을 기록한 공산일기를 남겼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였스며, 한강 정구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고 1582년 생원시 자우언 1588년에는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북 보은 속리산에서 충보군을 조직하여 왜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관군에게 군량을 조단하기 위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많은 공을 세웠다
1602년 기촉옥사와 관련하여 왕에게 직언을 올린 일로 공주에 유배를 오게되었고 5년간의 유배생활을 기록한 공산일기는 17세기 초 공주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1607년 유배가 끝난 후 관작이 회복되었고, 1613년 5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후일 유림들의 뜻으로 속수서원에 제향되었다.